박은선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손톱 끝에 걸린 세상이 월훈출판사에서 출간됐다. 거대한 사건보다 일상에 남은 미세한 흔적을 바라보는 작품집이다. 시인은 손끝에 닿는 감각과 오래된 기억을 통해 삶의 상처를 응시한다. 사라질 듯한 순간을 붙잡는 절제된 언어도 이번 시집의 중심을 이룬다.
![]() [코리안투데이] 박은선 시인이 길어 올린 작고 깊은 삶의 진동 © 김현수 기자 |
이 책은 2026년 2월 10일 출간된 180쪽 분량의 양장본이다. 국제표준도서번호는 9791199000964다. 온라인 서점에 공개된 서지 정보에 따르면 책은 모두 5부로 구성됐다. 1부부터 4부까지 시 작품이 이어지며, 5부에는 작가의 말과 배경식의 글, 이승하 시인의 해설이 실렸다. ([예스24][1])
1부는 내 붉은 방석에 누워버린 절명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감꽃, 고요의 산실, 그리움의 감옥, 달빛 유감, 사랑의 불꽃, 삶의 원점 등이 수록됐다. 상실과 고독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을 과도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작품들이다. 시인은 고통을 직접 설명하기보다 사물과 풍경에 남은 흔적으로 보여준다.
2부 장미, 그 환생에서는 상처 이후에도 다시 피어나는 생명에 주목한다. 겨울 호수의 꽃, 나룻배 노 저어 가는 길, 바람의 연, 장미의 제국, 전령사의 비행 등이 독자를 만난다. 장미와 꽃, 바람과 섬 같은 자연의 이미지는 단순한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기억과 회복을 연결하는 시적 통로로 작용한다.
표제작 손톱 끝에 걸린 세상은 3부 잠잠히, 그러나 영원히에 배치됐다. 이 제목은 시집 전반을 관통하는 박은선 시인의 시선을 압축한다. 손톱 끝은 매우 작지만 예민한 감각이 모이는 자리다. 시인은 그 작은 지점을 통해 지나간 시간과 사람, 마음속에 남은 통증을 다시 불러낸다.
3부에는 결별 선언, 만월의 분신, 사건의 전말, 쉼표, 여백의 춤, 예측 불허, 은비늘 눈물 등이 함께 실렸다. 작품들은 침묵과 여백이 지닌 힘을 강조한다. 말하지 못한 감정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잠잠한 상태와 영원한 지속을 나란히 배치한 부 제목 역시 이러한 시적 태도를 드러낸다.
4부 꽃 피는 詩의 달은 기억과 자연, 지역의 정서를 넓게 펼쳐 보인다. 꽃피는 시의 달, 노화도 연정, 대흥사에서, 바다에 안긴 갈대, 백일홍 사랑, 송호리 포구, 자화상 등이 수록됐다. 특정 장소와 자연물은 개인의 기억을 깨우는 매개가 된다. 바다와 꽃, 포구와 바람은 시인이 살아온 시간과 만나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박은선 시인은 대전광역시 출신으로 한국문인협회와 한국현대시인협회, 국제PEN한국본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바다의 달을 만나기 전과 바다만 아는 비밀 등을 펴냈다. 이번 작품은 그의 다섯 번째 시집으로 소개됐다.
![]() [코리안투데이] 다섯 번째 시집에 담긴 상처와 기억, 회복의 언어를 따라가다 © 김현수 기자 |
책의 마지막인 5부 피사체 앞에서에는 작가의 말과 경식의 書, 이승하 시인의 해설 시를 쓰면 아픔이 사라지더이다가 담겼다. 해설은 박은선의 시가 독자 가까이에서 이야기를 건네는 언어라는 점에 주목한다. 난해한 표현에 기대기보다 상처와 삶을 독자가 체감할 수 있는 이미지로 풀어낸다는 평가다.
손톱 끝에 걸린 세상이 보여주는 세계는 화려하거나 거대하지 않다. 눈빛과 달무리, 꽃과 바람, 손끝의 온기처럼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대상들이 시의 중심에 놓인다. 작은 대상에 집중하는 시선은 평범한 하루가 수많은 기억과 관계로 이루어졌음을 환기한다.
특히 시집은 아픔을 극복했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상처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다. 쉼표와 여백, 꽃과 파도 같은 이미지가 반복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멈춤은 끝이 아니라 호흡을 되찾는 시간이다. 기억은 과거에 갇히는 일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확장된다.
박은선은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자신의 고통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독자는 작품 속 상실과 기다림을 따라가며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시인의 구체적인 장면이 독자의 경험과 만나는 순간, 한 사람의 이야기는 여러 사람의 삶을 비추는 언어가 된다.
손톱 끝에 걸린 세상은 사소한 순간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 왜 필요한지 묻는 시집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놓친 감정과 관계를 다시 만져보게 한다. 손끝에 겨우 걸린 작은 기억도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하게 전한다.
[ 김현수 기자: [incheoneast@thekorean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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