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8월 30일, 월요일 아침. 처서(處暑)가 지난 지 이레, 경성 거리엔 한풀 꺾인 볕이 내려앉았다. 동아일보 편집국의 최원순 기자는 달력의 숫자를 헤아리고 있었다 — 9월 8일, 경성지방법원 공판까지 아흐레. 나흘 앞서 중국 후베이(湖北)에서는 북벌군이 오패부(吳佩孚)의 마지막 방어선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날 정오, 허성교(賀勝橋)가 무너졌다.
그날의 경성이야기는 여드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월 22일 일요일자 동아일보 1면 「횡설수설」란에 최원순 기자는 짧은 글 한 줄을 얹었다. 조선총독부가 내세운 ‘문화정치’의 속을 겨눈 글이었다 — 사회주의자들을 잡아들이고, 신문 기사를 지우고,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순사를 세우는 통치를 두고 한 말이었다. 글은 짧았지만 파장은 짧지 않았다. 당국은 글쓴이 최원순을 보안법 위반으로, 편집 겸 발행인 김철중을 신문지법 위반으로 걸었다.
8월 30일 현재, 두 사람의 공판은 9월 8일 경성지방법원으로 잡혀 있었다. 아직 구형(求刑)조차 나오지 않은 이 시점부터 언론계 안팎은 술렁였다. 최원순은 언론인 단체 무명회(無名會)를 되살려 전조선 기자대회를 이끌어낸 인물이었다 — 글 한 줄로도 잡혀갈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거리의 신문팔이 소년들은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이, 그저 오늘치 신문을 목청껏 외치며 종로를 오갔다. 검열을 통과한 기사와 통과하지 못해 먹칠된 기사가 나란히 팔려나가는 아침이었다.
경성과 한반도경성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이달 초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 8월 초 관서(關西) 지방을 덮친 폭우로 대동강·청천강·압록강이 한꺼번에 불어났다. 지난해 을축년(乙丑年) 대홍수의 기억이 채 가시기도 전에 찾아온 물난리였다. 평안도 일대에서는 여전히 무너진 둑을 다시 쌓고 물에 잠겼던 논밭을 갈아엎는 손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편 도쿄 유학생 사회에서는 이달 들어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다. 일월회(一月會) 계열의 안광천·하필원 등이 레닌주의동맹에 합류하며 이른바 ‘ML파’라는 사회주의 분파가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순종의 인산과 6·10만세운동을 거친 지 두 달, 조선 사회의 감시망은 여전히 촘촘했고, 그 틈새에서도 크고 작은 움직임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날의 세계그 시각 중국 후베이성. 8월 26일부터 사흘을 끈 정사교(汀泗橋)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국민혁명군은 오패부의 잔여 병력을 허성교까지 몰아붙였다. 그리고 8월 30일 낮 12시, 혁명군은 허성교를 완전히 점령했다. 우한(武漢)으로 가는 길목 하나가 뚫린 순간이었다.
같은 날 이탈리아 로마에서는 무솔리니 정부가 국왕칙령 제237호를 공포했다. 그때까지 선거로 뽑던 지방 자치단체장과 의회를 폐지하고, 중앙이 임명하는 ‘포데스타(podestà)’로 갈아치우는 내용이었다. 이날로 이탈리아의 지방자치는 사실상 문을 닫았다.
경성 24시최원순의 하루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흘렀을 것이다 — 편집국에 앉아 원고를 매만지고, 무명회 동료들과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는 하루. 다만 확인된 기록은 여기까지다. 그가 9월 8일을 어떤 표정으로 기다렸는지는 신문에 남아 있지 않다.
저녁 무렵 종로 거리에는 전차가 오가고, 상점들은 하나둘 문을 닫을 채비를 했다. 처서를 넘긴 밤바람은 한결 선선해져 있었다. 검열과 재판을 앞둔 신문사 안팎의 긴장과 달리, 거리의 하루는 평범하게 저물어갔다.
100년의 거울항목
1926년
2026년글 한 줄의 무게칼럼 한 줄로 보안법 기소표현의 자유, 원칙상 헌법 보장기사 검열총독부 사전검열, 삭제·먹칠사후 자율 심의 중심 기자 단체무명회, 전조선 기자대회언론노조·기자협회 등 다수기소 후 공판까지약 2주 만에 공판 지정사건에 따라 수개월~수년
100년 전 오늘, 최원순은 자신이 쓴 한 줄의 대가를 재판정에서 치러야 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언론의 자유는 어느 사회에서나 ‘기본값’이 아니라 ‘지켜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내일, 1926년 8월 31일. 허성교를 넘은 북벌군의 다음 목표와, 관서 수해 복구의 뒷이야기를 좇아본다. 내일 아침 10시 10분,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