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온 인공지능] 제1권 · 제15장 · 손으로 옮겨 적던 공문 한 장이 남긴 것과 남기지 못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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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리안투데이 경기하남

지난 화요일 오후, 강화군 화도면의 한 마을회관에서였습니다. 이장님이 창가 탁자에 앉아 면사무소에서 온 공문을 공책에 옮겨 적고 계셨습니다. 볼펜 끝이 종이를 누르는 소리가 조용한 회관 안에 또박또박 들렸습니다. 제가 왜 복사를 하지 않으시느냐고 여쭈었더니 이장님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사기는 글자만 베끼지. 손으로 써야 머리에 남아. 그리고 이 공책은 내 다음 이장이 볼 거야.”

  [코리안투데이] 마을회관에서 공문을 옮겨 적는 이장님의 손 © 장형임 칼럼니스트

그 공책을 잠시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앞장에는 몇 해 전 마을 상수도 공사 때 어느 집 앞 길이 파였는지, 누가 항의를 했고 어떻게 달랬는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공문에는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공문은 ‘공사 완료’라고만 말하지만, 공책은 그 공사가 마을 사람들 사이를 어떻게 지나갔는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진짜 마을의 기록이라고 느꼈습니다.

이장님은 올해로 열두 해째 이장을 맡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전 이장님도 비슷한 공책을 남기셨는데, 돌아가신 뒤 자녀분이 집을 정리하면서 함께 버려졌다고 합니다. “그때 그 공책만 있었으면 저수지 물길 문제는 반년은 빨리 풀렸을 텐데.” 이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며 공책을 덮으셨습니다. 마을의 기억이 한 사람의 서랍 속에 담겨 있다가 그 서랍과 함께 사라지는 장면이 제 눈앞에 그려졌습니다.

저는 요즘 인공지능 이야기를 많이 씁니다. 그런데 그날 회관에서 느낀 것은 기술의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이장님의 공책을 사진으로 찍어 글자로 바꾸고, 날짜와 장소로 찾아볼 수 있게 만드는 일은 지금 제 손 안의 전화기로도 어렵지 않습니다. 부족한 것은 ‘이것을 남겨야 한다’고 마음먹는 사람과, 그 마음을 이어받을 다음 사람이었습니다.

회관을 나서기 전에 이장님께 조심스럽게 제안을 드렸습니다. 공책 한 권을 제가 빌려 전화기로 찍고, 글자로 옮겨서 돌려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이장님은 한참 공책을 만지작거리시다가 웃으셨습니다. “그거 되면 우리 마을 옛날 이장들 얘기도 다 넣어야지. 그건 내 머릿속에만 있는데.” 저는 그 말씀이 인공지능보다 훨씬 귀한 자료라고 생각했습니다. 기계는 있는 것을 옮길 뿐, 머릿속에만 있는 것을 꺼내는 일은 사람이 먼저 입을 열어야 시작됩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는 우리 집 서랍을 떠올렸습니다. 어머니가 남기신 계모임 장부, 아버지가 적어 두신 밭 경계 메모 같은 것들입니다. 저 역시 그것들을 언젠가 정리하겠다고만 생각하며 미루고 있었습니다. 이장님의 공책을 보며 부끄러웠던 것은, 남의 마을 기록을 걱정하기 전에 제 집안의 기록조차 손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기록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장님의 볼펜 소리처럼 작고 느린 일입니다. 다만 그 느린 일을 누군가 이어받지 않으면, 마을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같은 물길 문제를 다시 처음부터 풀어야 합니다.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몫은 그 이어받는 일을 조금 덜 수고롭게 만드는 정도이고, 저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여러분의 집이나 마을에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만, 혹은 서랍 한 칸에만 담겨 있는 기록이 있으신가요. 그것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려면 무엇부터 하시겠습니까. 저는 이번 주말에 이장님 공책부터 사진으로 옮겨 보려 합니다.

마을회관 창가에서 볼펜을 쥔 손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저는 그 손이 쓰던 것을 기계가 대신 쓰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손이 멈춘 뒤에도 그 글이 남아 있도록, 옆에서 조금 거드는 사람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이 이야기와 이어지는 기록은 제가 강화에서 쓰고 만든 책과 서비스에도 담겨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에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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