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 – 신라 편] 제17화: 나당전쟁 – 진정한 통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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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리안투데이 경기하남

역사는 살아있다 – 신라 편 제17화 삽화 (AI 생성 이미지 · 코리안투데이 · 실제 현장 사진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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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 TODAY

역사는 살아있다

신라 편

제17화: 나당전쟁 – 진정한 통일을 위해

전쟁에서 이긴 뒤에 가장 위험한 순간은, 도와준 친구가 주인 행세를 시작할 때입니다.

668년 평양성이 무너지자 신라는 삼국통일의 문턱에 섰습니다. 그러나 축배를 들 틈도 없었습니다. 함께 싸운 당나라가 고구려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백제 옛 땅에 웅진도독부를 두고, 심지어 신라마저 계림도독부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름만 ‘동맹’일 뿐 한반도 전체를 당의 지방 행정구역으로 만들려는 구상이었습니다.

그때 신라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당나라와 맞서는 길은 무모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약 7년에 걸친 싸움 끝에 당군을 한반도 남쪽에서 몰아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자주’와 ‘주권’의 원형이 이 전쟁에 있습니다.

◆ 시대의 풍경

7세기 동아시아는 당나라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습니다. 당은 630년대 이후 북방과 서역으로 세력을 넓혔고,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신라와 함께 무너뜨렸습니다. 당의 목표는 ‘신라 도와주기’가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 확보였습니다. 663년 백제 부흥군과 왜의 연합군이 백강(백촌강)에서 당·신라 연합군에 패한 뒤, 한반도 정세에서 당의 입김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갈등은 백제 땅 처리에서 터졌습니다. 신라는 옛 백제 지역을 차지해 나갔고, 고구려 부흥군(검모잠, 안승 등)을 받아들여 670년 무렵부터 당의 거점을 선제 공격했습니다. 신라는 안승을 674년 보덕왕으로 책봉해 고구려 유민 세력을 우군으로 삼았습니다. 당은 이에 674년 문무왕의 왕위를 박탈하고 당에 있던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임명한다고 선포하며 대군을 보냈습니다. 신라는 한편으로 사죄 사절을 보내 시간을 벌고, 한편으로는 방어선을 다지는 이중 전략을 폈습니다.

“(취지 요약) 겨울 11월, 설인귀가 수군을 이끌고 기벌포에 침입하니 우리 군사가 맞아 싸웠다. 앞뒤로 스물두 번 싸워 모두 이기고 당군 4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 출처: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6년(676) 조 (원문의 취지를 풀어 옮김)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당 고종 시대. 서쪽에서는 토번(티베트)이 670년 대비천 전투 등으로 당을 압박해, 당은 두 방면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 유럽/중동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4세 치하에서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통상 674~678년)를 그리스의 불로 막아냈습니다.

🌏 기타 지역

일본(왜)은 백강 패전 후 국방을 정비하며 율령 국가로 나아가고 있었고, 신라와 사절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재조정했습니다.

나당전쟁 (670-676) 주요 전선

안동도호부
(옛 고구려 지역)

신라

웅진도독부
(옛 백제)

매소성 675

기벌포 676

당 육군 (이근행)

당 수군 (설인귀)
※ 개념도: 경계와 위치는 개략적 표현입니다

[이미지: 나당전쟁 주요 전선 개념도 (670-676년)]

⚔️ 그날의 현장

“675년 가을, 임진강 북쪽 매소성 일대. 안개 걷히는 들판을 가득 메운 당군 진영에서 말울음이 번졌다. 이근행이 이끄는 대군이 겹겹이 쳐 놓은 진지 앞에서 신라 병사들은 숨을 죽였다.”

“신라군은 정면 승부만 고집하지 않았다. 당의 보급을 끊고 말 먹이를 노리며 흔들었고, 마침내 일제히 공격에 나서자 당군은 흩어졌다. 전장에 남은 군마만 3만 필이 넘었다고 사서는 전한다. 이 장면 묘사는 사료의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나당전쟁의 핵심은 ‘대결전’이 아니라 ‘소모전’이었습니다. 신라는 670년 선제 공격으로 포문을 열었지만, 672년 석문 전투 등에서 당군에게 크게 패하며 전략을 방어 중심으로 바꿨습니다. 이후 요충지마다 성을 쌓고, 당의 긴 보급선을 괴롭히는 장기전으로 끌고 갔습니다. 675년 9월 매소성에서는 이근행이 이끄는 당의 20만 대군을 신라가 격파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합니다. 이어 676년 11월 기벌포에서 설인귀의 수군을 스물두 번의 싸움 끝에 물리쳤다고 기록합니다.

물론 전쟁 막바지의 결과가 한 번의 승리로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당은 서쪽 토번과의 전쟁 부담이 커졌고, 676~677년 무렵 안동도호부를 요동 방면으로 옮기는 등 한반도 남쪽 경영에서 물러났습니다. 신라는 대동강 이남 무렵까지를 확보했습니다. 사서의 ’20만’이나 ‘말 3만 필’ 같은 숫자는 과장됐을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해야 합니다. 결과는 분명합니다. 당은 백제 옛 땅과 한반도 남부에서 지배권을 포기했습니다.

이 승리는 외교와 군사, 민심이 합쳐진 결과였습니다. 신라는 고구려·백제 유민을 끌어안아(보덕국 등) 당과 맞설 명분과 인력을 확보했고, 당에는 사죄 사절을 보내 전면전 확대를 늦췄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한 나라의 백성’이라는 의식이 이 시기부터 싹텄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시대

7세기 후반 (670-676년)

핵심 인물

문무왕, 김인문, 이근행, 설인귀

핵심 사건

매소성(675)·기벌포(676) 전투

영향

당군 축출, 대동강 이남 확보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교과서는 매소성(675)과 기벌포(676) 승리로 신라가 당군을 축출하고 삼국통일을 완성했다고 서술합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록이 근거입니다.

대안적 견해

두 전투가 결정적 대승이었는지, 매소성의 위치가 어디인지, 기벌포 전투가 676년이 맞는지를 두고 이견이 있습니다. 당이 토번 문제로 스스로 물러났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나당전쟁은 ‘통일’이 단순한 영토 합병이 아니라 ‘주권을 스스로 지키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신라는 당의 힘을 빌려 통일의 길을 열었지만, 그 도움이 지배로 바뀌려 하자 가장 강한 동맹과 맞서는 용기를 냈습니다. 동시에 무작정 충돌하지 않고 외교로 시간을 벌며 힘을 기르는 현실 감각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오늘 한반도는 여전히 강대국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안보 동맹, 경제 협력, 공급망 문제에서 우리는 협력과 자율 사이의 균형을 끊임없이 고민합니다. 신라의 교훈은 ‘누구와도 싸우자’가 아닙니다. 협력하되 핵심 이익은 스스로 결정할 힘을 키우는 것, 그것이 진정한 독립의 조건이라는 점입니다.

구분 신라 시대 현재
정치/안보 동맹국 당의 지배 시도에 맞서 주권 수호 동맹 속에서도 안보 자율성과 주권 확보
군사/외교 성곽 방어·보급선 교란과 사죄 사절 병행 억제력 강화와 다자 외교 병행
문화/정신 유민을 아우르는 ‘한 나라’ 의식, 상무정신 K-Defense, 자주국방 의지

주권 수호의 길: 신라에서 오늘로

668
고구려 멸망

670
나당전쟁 발발

675
매소성 승리

676
기벌포 승리

오늘
자주와 협력의 균형

동맹은 존중하되, 주권은 스스로 지킨다
외교 · 방어 · 민심 결집 — 신라가 택한 세 개의 축

[이미지: 신라 정신과 현대 한국]

📚 더 깊이 알아보기

  • 기벌포는 금강 하구 일대로 비정되며, 오늘날 충남 서천 일대가 유력 후보로 거론됩니다. 매소성은 경기 북부 임진강·한탄강 일대의 연천 부근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위치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 익산(금마저)은 안승의 고구려 유민 집단이 머물렀던 곳으로, 신라가 유민을 포용한 정책을 상징합니다. 백제 마지막 왕도의 유적과 함께 둘러볼 만합니다.
  • 《삼국사기》 권6~7 신라본기(문무왕 상·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당전쟁’·’기벌포 전투’ 항목을 함께 읽어 보세요.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삼국통일은 평양성 함락이 아니라, 당군을 물리치고 이 땅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힘을 증명한 676년에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도움을 받더라도 주인은 우리여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지켜낸 땅 위에서만 나라는 자기 이름으로 서 있을 수 있다. 신라 정신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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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신라 편 (총 3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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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콘텐츠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작성되었으며, 다양한 학술적 견해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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