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브릿지] 제4권 · 제12장 · 드라마 앞에 앉은 저녁, 그 침묵까지 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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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리안투데이 경기하남

저녁 여섯 시 반이 넘으면 종로3가 뒷골목 국숫집 주인 이복순 할머니는 손님이 남아 있어도 슬쩍 벽시계를 보십니다. 일곱 시가 되면 어김없이 텔레비전 채널을 일일드라마에 맞추고, 그때부터 삼십 분은 누가 불러도 잘 대답이 없으십니다. “이 시간만큼은 나 혼자만의 시간이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그냥 취미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취재를 거듭할수록, 그 삼십 분이 할머니의 하루를 지탱하는 기둥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복순 할머니는 남편을 몇 해 전 먼저 보내고 자녀들은 모두 지방에 흩어져 삽니다. 국숫집을 정리하지 않는 이유를 여쭤보니 “사람 얼굴 보는 게 좋아서”라 하셨고, 드라마를 거르지 않는 이유를 여쭤보니 “그 사람들은 매일 나를 찾아오잖아”라 하셨습니다.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드라마 속 인물이 매일 찾아오는 이웃이 된다는 것, 자녀가 독립하고 배우자와의 대화가 줄어든 자리를 화면 속 얼굴들이 채운다는 것. 제가 이번 책 제12장을 쓰며 가장 먼저 붙잡은 문장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숫자로 확인해보면 이복순 할머니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통계청 『2025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한국 65세 이상의 하루 여가 시간은 7시간 3분으로 5년 전보다 12분 늘었고, 그중 미디어 이용 시간이 4시간 6분에 달합니다. 여가의 절반 이상이 화면 앞에서 흘러간다는 뜻입니다. 실시간 지상파 방송 시청 시간 중 50세 이상 비중은 2024년 이미 70%를 넘어섰습니다. 안방극장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 숫자가 먼저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 겨울 베이징 골목시장에서 두부를 팔던 쑨씨 아주머니(62)를 만났을 때, 저는 전혀 다른 풍경을 봤습니다.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을 좌판 옆에 세워두고 짬이 날 때마다 세로형 숏드라마를 보고 계셨습니다. 한 회가 1분 남짓, 한 편이 팔구십 회. “이복순 할머니가 저녁 삼십 분을 기다린다면 쑨씨 아주머니는 하루 종일 틈틈이 채워 넣는 셈이었습니다.” 실제로 QuestMobile 2024 조사에서는 중국 마이크로 숏드라마 이용자가 6억 6,200만 명에 달하고, 이 중 60세 이상이 12.1%, 베이징신문 조사로는 노년 응답자의 54.05%가 하루 1~2시간을 여기 씁니다. 『闪婚老伴是豪门』 같은 중·노년 로맨스 한 편이 더우인에서 5억 6천만 회 재생됐다는 이야기를 전해드리니, 쑨씨 아주머니는 “그거 나도 봤다”며 웃으셨습니다.

두 분을 나란히 떠올리면, 형식은 완전히 다른데 이유는 같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복순 할머니에게 드라마는 정시에 찾아오는 의례이고, 쑨씨 아주머니에게 숏드라마는 틈틈이 흩어지는 위안입니다. 하지만 두 분 다 화면 속 인물의 굴곡진 삶을 통해 자신의 하루를 견디고 계셨습니다. 보건복지부 노인실태조사와 중국사회과학원 보고가 공통으로 짚는 것도 이 지점입니다. 노년기 드라마 시청은 소일거리가 아니라 정서적 대체재라는 것. 예측 가능한 전개와 명확한 권선징악, 따뜻한 결말이라는 삼박자가 불안정한 현실과 대비되는 심리적 안정감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이 흐름은 개인의 취향을 넘어선 사회적 신호이기도 합니다.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이미 1,024만 명을 넘어섰고, 60대의 OTT 이용률은 66.7%까지 올라왔습니다. 노년층 동영상 시청 비율은 2019년 3.5%에서 2024년 21.6%로 여섯 배 넘게 뛰었습니다. 중국은 2027년 숏드라마 시장이 1조 위안 규모까지 커질 것으로 업계는 집계하고 있습니다. 두 나라 모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는 나라이고, 그만큼 콘텐츠 산업이 노년 관객을 중심에 두고 다시 설계되는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다만 중국에서는 ‘1위안 무료 체험 후 고액 결제’로 이어지는 소비자 피해가 상하이 소비자협회에 수천 건 접수되면서, 노년 이용자를 지켜줄 요금 고지 체계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는 점도 함께 기록해두고 싶습니다.

저는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자꾸 같은 질문을 떠올렸습니다. 우리 집 어른은 저녁 몇 시에 무엇을 보고 계실까, 그 시간을 저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드라마 취향을 묻는 일이 사소해 보여도, 어쩌면 그것이 그분의 하루를 들여다보는 가장 쉬운 문 하나일지 모릅니다. 오늘 저녁엔 부모님이나 조부모님께 “요즘 무슨 드라마 보세요”라고 한번 여쭤보시면 어떨까요. 그 대답 속에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겁니다.

책을 마무리하며 다시 읽은 원고에는 이런 문장도 남아 있었습니다. “드라마가 끝나면 정적이 찾아온다. 그 정적을 견디는 것이 진짜 하루의 마지막 숙제다.” 이복순 할머니를 몇 달 더 지켜보며 제가 알게 된 것은, 시청 자체보다 그 뒤에 오는 침묵이 더 무겁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화면이 꺼진 뒤 홀로 남는 그 몇 분을, 저는 취재 수첩에 옮기면서도 쉽게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번 취재를 마치며 한 가지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콘텐츠는 이제 노년의 삶에서 여가의 부속품이 아니라 관계를 대신하는 실질적 장치로 자리 잡았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2025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어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고, 중국 국가통계국은 60세 이상 인구가 3억 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두 나라 모두 홀로 사는 노인 가구 비율이 가파르게 늘고 있고, 정부는 저마다 돌봄 정책과 디지털 포용 정책을 손보고 있지만, 정작 그 시간 동안 이분들 곁을 지키는 것은 정책이 아니라 한 편의 드라마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 혹은 여러분 자신은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 화면 앞에서 무엇을 채우고 계신지, 한 번쯤 진지하게 물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복순 할머니와 쑨씨 아주머니, 그리고 화면 앞에서 하루를 견디는 더 많은 이웃들의 이야기는 제 책 「실버 브릿지: 디지털 실버」 제12장에 더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도서 상세 페이지(https://wiabook.com/books/silverbridge-vol04-kr/)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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