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KOREAN TODAY
역사는 살아있다
백제 편
제18화: 백제와 왜 – 형제의 나라
칼 한 자루가 1,650년을 건너 지금도 두 나라의 기억을 붙들고 있다.
일본 나라현 이소노가미신궁에 소장된 국보 ‘칠지도(七支刀)’. 일곱 개의 가지를 뻗은 이 철제 칼의 몸통에는 백제 왕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한일 관계가 정치적 이슈로 뜨거워질 때마다 이 칼은 어김없이 소환된다 — 그런데 정작 1,600여 년 전 백제와 왜는 서로를 어떻게 불렀을까.
4세기에서 7세기까지 300년 넘게 이어진 백제와 왜의 관계는 단순한 ‘전파’로 설명되지 않는다. 왕자가 바다를 건너 인질이자 사절로 살았고, 학자와 기술자가 배를 타고 오갔으며, 마지막 순간에는 백제 부흥을 위해 왜의 군대가 함께 싸우다 함께 무너졌다. 이 관계를 오늘의 잣대로 재단하기 전에, 그 시대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주고받았는지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 시대의 풍경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백제는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마한 잔여 세력을 흡수하며 동아시아 해상 교역의 한 축으로 떠올랐다. 369년(근초고왕 24년) 무렵 백제와 왜의 군대가 함께 가야 지역 소국들을 평정했다는 기록이 전하며, 이 시기를 전후해 백제 왕실은 왜왕에게 칠지도를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칠지도 제작 시기는 369년설과 408년설이 함께 제기되어 학계에서 여전히 논의 중이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진이 본격화되자 백제는 왜와의 협력을 한층 절실히 필요로 했다. 397년, 아신왕은 왕위 계승자인 태자 전지를 왜국에 보내 우호를 다졌다 —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인질이지만, 당시로서는 두 왕실을 잇는 가장 강력한 외교 수단이었다. 461년에는 개로왕이 아우 곤지(昆支)를 왜에 파견해 군사 협력을 재확인했고, 곤지는 그곳에서 오랜 세월 머물며 백제계 도래인 사회의 구심점이 되었다.
“6년(397) 여름 5월, 왕이 왜국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볼모로 삼았다.”
◆ 같은 시대, 다른 세계
🏛️ 중국
백제가 왜와 우호를 다지던 4~6세기, 중국은 남북조로 분열되어 있었다. 백제는 남조(동진·송·양)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으며 선진 문물을 흡수해 다시 왜에 전했다.
🗿 유럽/중동
태자 전지가 왜로 떠난 397년 무렵,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부족과의 인질 교환 외교로 국경을 지탱하고 있었고 476년 멸망을 향해 저물어가고 있었다.
🌏 왜(倭)
아직 문자 체계와 통일 왕권이 미성숙했던 왜는 백제로부터 한자, 유교 경전, 불교, 축성·조선 기술을 받아들이며 국가 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이미지: 백제-왜를 잇는 바닷길과 4~7세기 주요 교류 사건]
⚔️ 그날의 현장
“397년 여름, 한강 하구의 포구. 아직 앳된 태자 전지는 궁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썼다. 아버지 아신왕의 마지막 당부가 귓가에 맴돌았다 — ‘너는 인질이 아니라 사절이다. 두 나라를 잇는 다리가 되어라.'”
횃불이 늘어선 부두에서 관복 입은 신하들이 허리를 숙였고, 배에는 학자와 장인들이 함께 올랐다. 돛이 오르는 순간, 태자는 자신이 향하는 곳이 낯선 유배지가 아니라 또 하나의 백제가 될 것임을 아직 알지 못했다.
◆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
백제와 왜의 관계를 ‘문화 전수’라는 한 단어로만 요약하면 이 관계의 복합성을 놓치게 된다. 397년 태자 전지의 도왜(渡倭)를 시작으로, 461년 곤지의 파견, 그리고 곤지의 아들로 알려진 동성왕·무령왕에 이르기까지, 백제 왕실과 왜 왕실은 인적으로도 깊이 얽혀 있었다. 무령왕이 왜의 규슈 인근 섬(가카라시마)에서 태어났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오늘날 무령왕릉 발굴로 다시 주목받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화의 흐름도 결코 일방적이지 않았다. 아직기는 근초고왕의 명으로 말을 데리고 왜에 건너가 경서를 가르쳤고, 뒤이어 왕인(王仁)이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도일했다고 전한다. 다만 《천자문》의 실제 저자로 알려진 양나라 주흥사(周興嗣)가 5~6세기 인물이라는 점에서, 왕인의 도왜 연대 자체가 학계의 오랜 논쟁거리다 — 《일본서기》의 초기 기년을 실제보다 두 갑자(120년) 앞당겨 기록했다는 이른바 ‘기년 조정론’을 적용하면, 왕인의 실제 도왜 시점은 4세기 말이 아니라 5세기 초에 가깝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538년(혹은 552년) 성왕이 노리사치계를 보내 불상과 경전을 전한 사건은 일본 고대 불교 공전(公傳)의 출발점으로 기록된다. 이렇듯 사람, 학문, 종교, 기술이 오간 끝에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하자, 왜는 인질로 머물던 왕자 부여풍을 귀국시키고 대규모 함대를 보내 백제 부흥군과 함께 싸웠다 — 그 마지막 격전이 663년 8월 백강(白江)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이 패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고, 이후 다수의 백제 유민이 왜로 망명해 일본 고대 국가 형성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시대
4세기~7세기
핵심 인물
아신왕, 태자 전지, 곤지, 성왕
핵심 사건
칠지도, 인질 외교, 불교 전파, 백강 전투
영향
고대 일본 국가체제 형성에 기여
🔍 학계의 시각
주류 견해
백제가 선진 문물의 발신지였고, 왜는 인적·물적 교류를 통해 국가 체제와 문자·종교 문화를 수용했다는 관점이 한일 학계 모두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진다.
대안적 견해
일본 일각의 옛 ‘임나일본부설'(왜가 4~6세기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주장)은 한일 학계 대부분에서 사료적 근거 부족으로 배격되며, 최근에는 대등한 ‘형제 관계’나 상호 인적 네트워크로 재해석하는 흐름이 강하다.
◆ 오늘 우리에게 묻다
한일 관계가 정치적 긴장으로 얼룩질 때마다 우리는 종종 두 나라를 원래부터 대립해온 사이로 단순화한다. 그러나 태자 전지와 곤지, 왕인과 아직기의 이야기는 두 사회가 한때 얼마나 촘촘하게 얽혀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문화 교류의 역사를 정치적 우열의 도구로 소비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오래된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에게 요구하는 태도일지 모른다.
동시에 백강 전투는 동맹이 영원하지 않다는 냉정한 교훈도 남긴다. 왜의 대규모 파병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재건되지 못했다 — 오늘날 안보 동맹을 논할 때도, 선의만으로는 국가의 존속을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 구분 | 백제 시대 | 현재 |
|---|---|---|
| 정치/안보 | 왕자를 서로 보내는 인질 외교로 동맹을 보증 | 조약·정상외교를 통한 안보 협력 체제 |
| 군사/외교 | 백강 전투 – 백제·왜 연합 함대의 공동 참전 | 한·미·일 안보 협력 및 연합 훈련 |
| 문화/정신 | 한자·불교·건축기술의 전수 | K-컬처의 세계적 확산과 교류 |
[이미지: 고대 문물 교류에서 현대 한류 확산으로 이어지는 상징적 타임라인]
📚 더 깊이 알아보기
- 전남 영암 왕인박사 유적지 – 왕인의 도일 전승을 기리는 사적
- 오사카 아스카베신사(飛鳥戸神社) – 곤지왕을 신으로 모신 것으로 전해지는 신사
- 무령왕릉 지석과 《일본서기》 기록의 교차 검증 연구
살아있는 역사의 목소리
국경을 넘나든 왕자와 학자들이 남긴 것은 지배와 종속의 기록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했던 두 사회의 오래된 대화였다.
“형제의 나라는 사라졌지만, 그들이 주고받은 글과 믿음과 기술은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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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투데이 “역사는 살아있다” 시리즈
백제 편 (총 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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